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싱턴 위저즈 (문단 편집) === 암흑기 === 1981년에 언셀드가 선수로서 은퇴한 뒤 부사장으로 선임됐고, 헤이즈는 휴스턴이 지닌 드래프트 픽 2장과 맞바꿔졌으며 컵책은 FA로 풀려 레이커스로 떠났다.[* 대신 팀은 그 보상으로 레이커스로부터 1982년 드래프트 3라운드 및 1983년 1라운드 픽을 받았다.] 드래프트에서 전체 11번으로 웨이크포레스트 대학교 출신 프랭크 존슨을 뽑고 스페인 FC 바르셀로나 바스케트에서 뛰던 제프 룰랜드[* 1980년 드래프트 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의해 2라운드 2번으로 뽑혔지만, 불리츠로 트레이드된 상태였다.]랑 계약해서 그렉 발라드, 릭 마혼 등과 짝을 지어 팀을 개편했고, 정규시즌에서 43승 39패로 플옵에 올라 1라운드에서 벅 윌리엄스의 뉴저지 네츠를 2전만에 꺾고 2라운드에서 래리 버드의 보스턴과 맞붙었다가 1승 4패로 졌다. 1982-83 시즌에는 42승 40패로 5할을 찍었으나 7위로 플옵에 못 갔고, 1983년 드래프트 때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출신 제프 말론을 전체 10번, 인디애나대 출신 랜디 위트먼을 22번으로 각각 뽑았지만 위트먼은 애틀랜타 호크스의 톰 맥밀런 및 1984년 드래프트 2라운드 픽과 맞바꿔졌다. 정규시즌에서 룰랜드의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35승 47패를 찍어 플옵에 또 갔지만 보스턴에게 1승 3패를 당했다. 1984-85 시즌 도중에 룰랜드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40승 42패로 또 플옵에 갔다가 어빙과 모제스 말론이 이끄는 필라델피아에게 1승 3패를 당했다. 1985년 드래프트 때 웨이크포레스트대 출신 케니 그린을 12번, 수단 출신의 최장신 농구선수 [[마누트 볼]](브릿지포트대)을 31번으로 각각 뽑고, 정규시즌에서 신인인 볼의 폭발적인 블로킹 능력을 선보여 397블록을 찍었다. 그러나 같은 신인인 그린은 제 활약을 못 펼치고 1986년 1월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레온 우드와 맞바꿔졌다. 3월에 슈 감독은 32승 37패 시점에서 해고당했고, 당시 CBS 해설위원을 하던 케빈 로커리가 급히 감독 자리를 메꿔 7승을 더 올려서 플옵에 나간 뒤 필라델피아랑 또 맞붙었으나 2승 3패로 졌다. 1986년 오프시즌 때 룰랜드 및 클리프 로빈슨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모제스 말론, 테리 캐트리지, 동년 드래프트 1라운드 픽과 맞바꾼 뒤, 드래프트에서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출신 존 "핫 플레이트" 윌리엄스를 12번, 네바다 대학교 라스베가스 캠퍼스 출신 앤써니 존스를 21번으로 각각 뽑았다. 정규시즌에선 볼과 모제스 말론, 제프 말론 등의 활약으로 42승 40패로 플옵에 나갔다가 '배드 보이즈'로 각성해가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막강 수비력 앞에 3전 전패를 당했다. 1987년 오프시즌 때 언셀드가 코치로 선임됐고, 드래프트에서 웨이크포레스트대 출신의 단신 선수 [[먹시 보그스]]를 12번으로 뽑는 한편 뉴욕 닉스의 에이스였던 버나드 킹을 FA로 영입하고, 마이클 애덤스 및 제이 빈센트를 덴버 너기츠의 대럴 워커 및 마크 앨리와 맞바꿔 전력 보강을 했다. 정규시즌에선 초반 27경기만에 8승 19패로 부진을 보여 로커리 감독이 쫓겨나자, 언셀드 코치가 감독 자리를 메워 30승을 더 거둬 플옵에 간신히 나가 디트로이트를 또 상대했지만, 2승 3패로 졌다. 1988년 드래프트 때 오클라호마 대학교 출신 하비 그랜트[* 호레이스 그랜트의 동생.]를 전체 12번으로 뽑고, 모제스 말론과 프랭크 존슨을 FA로 풀어 애틀랜타 호크스와 뉴저지 네츠로 각각 떠나보냈다. 정규시즌 때 40승 42패를 찍었지만 9위에 그쳐 플옵은 못 갔고, 1989년 드래프트 때 조지아 공과대학교 출신 톰 해먼즈를 전체 9번으로 뽑고 정규시즌에선 킹, 제프 말론, 핫 플레이트 윌리엄스 등도 같이 활약했으나 31승 51패로 추락했다. 1990년 오프시즌 때 유타 재즈 및 새크라멘토 킹스와 3각 트레이드를 맺어 1991년 드래프트 2라운드 픽을 새크라멘토의 퍼비스 앨리슨[* 루이빌대 1학년 때인 1986년 NCAA 전국대회에선 우승에 공헌했고, 1989년 드래프트 1위로 새크라멘토 킹스에 뽑혀 한때 주목받았지만 2000년 시애틀 슈퍼소닉스에서 은퇴 시까지 부상이 많아 제 역할을 못해왔다.]이랑 맞바꾸고, 제프 말론을 유타로 팔았다. 정규시즌에선 킹의 폭발적인 득점능력으로 동년 올스타에 선발되는 등 다시 한번 전성기를 보여줬지만 성적은 30승 52패를 찍었다. 1991년 오프시즌 때 보유 중이던 드래프트 픽 2장을 덴버의 애덤스 및 드래프트 픽 1장과 맞바꾸고, 해몬즈는 샬럿 호네츠의 렉스 챕맨, 워커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가 지닌 드래프트 픽 2장과 각각 맞바꿔졌다. 드래프트에선 루이빌대 출신 라브래드포드 스미스를 전체 19번으로 뽑았다. 그러나 정규시즌에선 킹을 비롯해 엘리슨, 애덤스, 챕맨 등이 부상 등으로 빠져 많이 움직이는 속공에 허점이 생기고, 대체로 수비진의 키가 작아 상대 선수들에게 뚫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또 애덤스와 렉스 챕맨 등 아웃사이드 플레이어들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선수들의 민첩성이 취약해 미스 매치를 남발하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엘리슨은 20득점 / 10리바운드로 기량발전상을 받았으나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못 뛰었으며 후보선수진도 빈약했다. 최종적으로 성적은 25승 57패를 찍었다. 1992년 드래프트 때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출신 톰 구글리오타를 전체 6번, 오클라호마대 출신 브렌트 프라이스[* 마크 프라이스의 동생.]를 32번으로 각각 뽑고, 윌리엄 베드포드 및 핫 플레이트 윌리엄스를 LA 클리퍼스의 돈 맥린과 맞바꿨다. 또한 디트로이트가 버린 신인 덕 오버튼과 휴스턴의 벅 존슨을 FA로 각각 영입했으나 레델 이클스는 체중 문제로 인해 CBA로 내쳐졌다. 정규시즌 들어 엘리슨 구글리오타, 하비 그랜트, 애덤스, 라브래드포드 스미스 등이 분전했지만 엘리슨은 또 부상이 도져 많이 나오지 못했고, 1993년 1월에는 킹을 FA로 풀어 방출시키는 등 여러 모로 변화를 주려 했지만 22승 60패로 굴러떨어졌다. 1993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6번으로 인디애나대 출신 칼버트 체이니를, 30번으로 루마니아의 231cm짜리 최장신 선수 게오르게 뮤레산을 각각 뽑고, 하비 그랜트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케빈 덕워스와 맞바꿨다. 정규시즌에선 라브래드포드 스미스를 FA로 풀어 새크라멘토로 내치는가 하면, 엘리슨은 또 부상을 당했다. 야심차게 사들인 덕워스가 체중 문제로 부진한 대신 뮤레산이 수비 전선에 뛰었다. 신인 체이니는 65게임을 소화하며 1게임당 평균 12득점, 야투 성공률 47%를 찍었으나 24승 58패로 마감했다. 1994년 오프시즌 들어 언셀드 감독이 팀에 염증을 느껴 사퇴하자[* 동년 11월부터 경영부사장으로 복귀함.],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단장이던 짐 라이넘이 감독으로 선임됐다. 드래프트 때 미시건대 농구부 시절 'Fab Five'의 일원이던 [[주완 하워드]]를 전체 5번으로 뽑고 트레이드 시장에선 보유 중이던 1996 드래프트 2라운드 및 1998년 1라운드 지명권을 올랜도 매직의 원년 선수 스캇 스카일스, 동시기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과 맞바꿨고, 애덤스를 샬럿 호네츠의 1996 및 1997년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이랑 맞바꿨다. 반면 엘리슨은 동년 4월 방출된 후 8월 FA에 따라 보스턴 셀틱스로 갔다. 11월에는 구글리오타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크리스 웨버]] 및 199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3개 픽이랑 맞바꿨지만, 덕워스 등이 부상에 시달려 제대로 못 나오는 바람에 21승 61패로 무너졌다. 1995년 드래프트에서 UNC 출신 [[라시드 월러스]]를 전체 4번으로 뽑고, 23번으로 텍사스대 출신 테렌스 렌처도 뽑았지만 마이애미 히트의 에드 스토크스 및 제프 웹스터랑 맞바꿨다.[* 스토크스는 히트가 1993년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35번으로 뽑아 놨지만 커리어 상당수를 이탈리아 등지에서 뛰었고, 1997년에야 토론토 랩터스에 합류하여 잠깐 NBA 경험을 했다. 웹스터는 불리츠 합류 후 정규시즌 개막 전에 CBA로 돌아갔다.] 트레이드 시장에서 덕 오버튼 및 돈 맥린을 덴버 너기츠의 로버트 팩과 맞바꿨고, 덕워스를 밀워키 벅스의 밥 맥캔, 199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과 묶어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에이스 [[마크 프라이스]]랑 각각 맞바꾸고 마이애미 히트로부터 레델 이클리스를 사는 등 팀을 또 갈아엎었다. 정규시즌 들어 웨버, 팩, 프라이스 등이 부상을 당하자 하워드, 뮤레산, 미첼 버틀러 등이 최선을 다했고, 신인 월러스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10득점 4리바로 준수한 모습을 보여 39승 43패로 5할 근처까지 갔다. 1996년에 폴린 구단주는 색스 부회장과 존 내시 단장을 내친 후 언셀드 경영부사장에게 단장까지 맡겨 프런트를 새로 짰고, 월러스와 버틀러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로드 스트릭랜드 및 하비 그랜트랑 맞바꿔서 팀을 개편했다. 또한 하워드와도 향후 7년간 1억 5천만불짜리 장기 계약을 맺어 신뢰를 보태려 했으며 동년 언드래프티 벤 월러스(버지니아 유니언대)도 영입했다. 정규시즌 도중인 1997년 2월에 라이넘 감독이 잘리자 밥 스타크 코치가 메꾸다가, 덴버 너기츠의 단장이던 버니 비커스태프가 12년만에 감독으로 팀에 돌아와 위기를 넘겼다. 부상에서 회복한 웨버의 스틸과 활기찬 속공, 엘리웁, 턴 오버 등에 이르는 프런트코트 중심의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여 44승 38패로 5할을 다시 넘겨 9년만에 플옵 진출을 이뤄냈으나, 유능한 스몰 포워드가 전무해 하프 코트에서 약점을 보여 시카고 불스에게 1라운드에서 3전 전패로 주저앉았다. 같은 시기 미국 전역에서 총기 난사 사고가 빈발하자, 수도에서 총알을 왜 팀 명칭으로 쓰냐고 하냐며 비난이 일었다. 1995년에 폴린 구단주가 팀명 변경을 선언하고 1997년에 공모전을 열어 팀명을 위저즈로 변경한 뒤 팀 컬러를 종전의 빨강-흰색-파랑에서 파랑-검정-흰색으로 바꿨고, 정든 캐피털 센터를 떠나 신설구장 'MCI 센터'로 이전했다. 오프시즌 당시 뮤레산이 발목 부상을 당해 전 경기를 결장하자 댈러스 매버릭스의 테리 데이비스를 FA로 영입했고, 팀명을 바꾼 첫 정규시즌에는 스트릭랜드, 웨버, 하워드, 체이니 등이 전과 같은 기세로 42승 40패를 찍었지만 플옵은 못 갔다. 1998년에는 웨버를 새크라멘토 킹스의 [[미치 리치몬드]] 및 오티스 도프랑 맞바꾸고, 하비 그랜트는 FA로 풀려 필라델피아로 가고 뮤레산은 방출됐다.[* 이후 그는 1998-99 시즌 도중 뉴저지 네츠와 계약했다.] 그러나 리치몬드는 선수로서 노쇠화된 탓에 제 활약을 못했고, 그 와중에 리더 하워드는 부상으로 인한 기량 저하, 파티장에서의 성추문 연루, 비커스태프 감독과의 갈등 등으로 침체기를 겪은 데다 스트릭랜드도 비커스태프 감독 해임 뒤 돌발 행동을 자주 벌여 팀 캐미스트리를 망치기도 했다. 여러 내홍 끝에 정규시즌을 18승 32패로 마감했다. 이 와중에 비커스태프 감독은 하워드랑 된통 싸운 게 독이 되어 50경기만에 잘렸고, 그 자리를 친구인 짐 브로벨리 코치가 메꿨다. 1999년에는 [[AOL]] 창업주 테드 레온시스가 에이브 폴린의 지분 일부를 샀고, 팀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코치이던 가 허드를 감독으로 불러왔다. 드래프트에서 전체 7번으로 코네티컷대 우승멤버 리처드 해밀턴을 뽑은 뒤, 트레이드 시장에서 테리 데이비스와 벤 월러스, 팀 레글러, 제프 매키니스 4명을 올랜도의 아이작 오스틴과 맞바꾸고 시애틀의 애런 윌리엄스와 밴쿠버의 마이클 스미스를 FA로 영입했다. 반면 체이니는 보스턴으로 떠났다. 그러나 하워드, 스트릭랜드, 리치먼드 등은 주급만 많이 받지 정작 경기에선 예전의 기량을 잘 선보이지 않아 정규시즌 초반에는 1승을 빼고 연패를 거듭하다 2000년 1월에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 그러나 경영자로서 조던은 별로 평가가 높지 않다. 그가 선택한 전체 1번 픽은 역대 최악의 픽 중 하나라는 [[콰미 브라운]](...) 또 밥캣츠 구단주로서 행사한 첫번째 픽으로 뽑은 애덤 모리슨은 그냥저냥 평범한 선수로 있다가 몇년만에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되어, 여기서도 별 활약없이(...) 2010년 우승반지를 낀다. 특유의 장발과 수염으로 인한 노안으로 벤치에서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기는 했다.(...) 2012년에 전체 2픽으로 뽑은 마이클 키드-길크리스트는 데뷔 후 3년째 평균득점이 한 자리에 그치고 있다. 이 때 6번으로 뽑힌 대미언 릴라드는 올스타에까지 뽑혔고, 9픽으로 뽑힌 안드레 드레먼드는 2014 시즌에 두자리수 득점과 리바운드를 해줬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못 뽑은 셈이다. 그가 뽑은 보물은 [[켐바 워커]] 정도다.]이 팀의 지분 일부를 사들여서 사장으로 부임했다. 부임한 후 그는 허드 감독을 자르고 불스 때 동료였던 대럴 워커(락포드 라이트닝(CBA) 감독)를 감독대행으로 불렀고, 디트로이트에서 내쳐진 돈 리드를 FA로 영입 후 스트릭랜드, 하워드, 리치몬드 등이 최선을 다해 3월에 10승 7패를 찍었으나, 최종적으로 29승 53패를 찍었다. 2000년 오프시즌 들어 마이애미 대학교 감독을 10년 동안 이끈 레너드 해밀턴을 새 감독으로 선임했고, 트레이드 시장에서 오스틴을 밴쿠버의 체로키 팍스, 오비나 에케지, 펠리페 로페즈, 데니스 스캇 4명과 맞바꾸고, 머레이를 덴버의 파파이 존스랑 맞바꿨다. 정규시즌 들어서 하워드의 부진, 리치몬드의 부상 등의 악재가 생기고, 해밀턴 감독도 대학 무대와는 달리 프로에서 적응을 못하여 연패만 거듭하자 조던 사장은 화가 치솟은 나머지 자구책을 마련했다. 에케지를 LA 클리퍼스의 타이론 네스비와 맞바꿔보기도 했고, 2001년 2월에는 골칫덩이였던 하워드를 캘빈 부스와 묶어 댈러스 매버릭스의 크리스찬 레이트너, 이탄 토마스, 코트니 알렉산더, 로이 보트, 허버트 데이비스 5명과 맞바꾼 뒤 3월에 스트릭랜드도 포틀랜드로 돌려보냈다. 당시 리차드 해밀턴이 최선을 다했지만 최종 성적은 19승 63패에 그쳤다. 조던 역시 2000년 11월 7일 당시 불스 경기에서 한 관중으로부터 "차라리 네가 뛰어줘!"란 말도 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